미국 정부가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에 대한 반도체 보조금 지원에 초과이익 공유 등 엄격한 조건을 내걸기로 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우리 기업들은 당혹감을 넘어 우려감을 내비치고 있다. 당장 미국에서 보조금을 받으면 투자 확대에 유리하기는 하지만 자칫 자사주 매입 금지, 이익 제한 등에 걸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딜레마에 빠져들 수 있어서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28일 “10년 동안 중국에 대한 투자를 제한받는 것도 부담인데 미국 정부 보조금을 덜컥 받아들였다가 더 큰 혹을 달게 되는 것 아닌지 겁도 나고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앞서 미국 정부가 발표한 ‘반도체과학법’은 반도체 제조 및 시험, 연구개발(R&D) 관련 시설 투자를 하는 기업에 보조금을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보조금에 5년 동안 390억 달러가 투입되고 반도체 제조 장비 구매와 시설 투자에도 25%의 세액공제가 주어진다. 세액공제에 따른 지원 효과는 10년간 240억 달러로 예상된다.
보조금 지급 규모는 매년 수십 조(兆) 단위 투자를 단행하는 반도체 기업 입장에서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미 정부는 프로젝트당 최대 30억 달러(약 3조 9000억 원)를 지원할 계획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미 이번 보조금 문제와 별개로 미국 내 투자를 늘리고 있거나 검토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 테일러시에 170억 달러를 투자해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공장을 구축하고 있다.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반도체 공장을 운영 중인 상태에서 미국 내 생산 능력을 더욱 높이려는 계획이다. SK하이닉스 또한 미국에 150억 달러를 들여 첨단 패키징·R&D 센터 등을 건설하겠다고 나선 상황이다. 미국이 자국 중심주의를 강화하면서 글로벌 첨단 반도체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미국 내 생산 시설을 확보해야 불이익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계산이 담긴 투자다.
문제는 당초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보조금 지급 조건이 추가로 공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날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보조금 수혜 기업은 자사의 구체적 재무 상태와 연간 실적 전망치를 미국 정부에 제출해야 한다. 만약 삼성이나 SK하이닉스가 예상을 웃도는 이익을 거두면 미국 정부가 초과이익에 대해 일종의 배당을 요구할 수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법인세 외에 준조세까지 요구받아 사실상 이중과세 부담을 지게 되는 셈이다.
NYT는 이와 관련해 “기업들이 보조금을 더 받기 위해 재무 상태나 손실을 과장하지 못하게 하는 안전장치”라고 설명했지만 ‘과장된 재무’나 ‘과장된 실적’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결국 기업들이 증명 의무를 져야 할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더해 보조금을 신청하는 기업은 자사주 매입도 제한될 것으로 알려졌다. 통상 자사주 매입은 기업들이 주주가치 제고 및 주가 부양을 위해 쓰는 전통적 경영 수단인데 미국 정부가 정한 기준에 부합되지 않을 경우 경영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될 수 있다.
보조금 신청을 검토하고 있던 기업들은 대부분 이 같은 제한 요건을 사전에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반도체 기업 관계자는 “미국 정부의 이런 조건을 사전에 파악하지 못한 상태여서 미국 정부가 구체적 조건을 발표하기만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사실상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정부 역시 미국 보조금과 관련해 세부적인 내용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보조금을 어떤 조건으로 받는지에 대한 내용까지 파악하고 있지는 않다”며 “다만 개별 조건은 미 정부와 기업 간 협상에 따라 조율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번 보조금에 따라 우리 기업들이 국내외 안팎에서 심각한 영향을 받을 수도 있는데 가이드 역할을 해줘야 할 정부가 기업이 책임질 일이라는 식으로 지나치게 안일하게 사안에 접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대다수 국내 반도체 기업은 미국의 이번 조치에 따라 미국과 중국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양자택일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미국 정부는 이번 반도체법에 ‘가드레일’ 조항을 넣어 인센티브를 받는 경우 중국 등 ‘우려국’에 반도체 시설을 새로 짓거나 기존 시설에 추가 투자할 수 없도록 조건을 걸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에 핵심 생산 시설을 갖추고 있는 데다 매출의 상당 부분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 낸드플래시 생산 공장, 쑤저우에 반도체 후공정(패키징)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우시와 충칭, 다롄에 각각 D램·후공정·낸드 공장을 갖고 있다.
여기에 예민한 가드레일 조항을 받아들이면서 보조금을 신청하면 중국과의 관계 경색이 불가피하다는 점도 우려되는 대목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관련 중국 매출 비중은 30%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반도체 칩과 과학법]
미국이 반도체산업 분야에서 중국에 대한 기술적우위를 강화하기 위한 반도체 생태계 육성법안. 반도체와 과학산업에 2천800억달러(약366조 원)을 투자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미국 반도체 지원법'으로도 불린다.
-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면 프로젝트당 최대 30억 달러(약 3조 9000억 원)
10년간 최대 240 억달러(31조 300억)의 보조금 을 지원한다
- 보조금을 신청한 반도체 기업이 1억5000만 달러 이상 지급 받을 경우 미 정부와 '초과 이익을 공유해야 한다'
- 보조금 혜택을 받는 기업이 향후 10년 동안 미국이 지정한 '우려 국가'에 투자가 금지되는 이른바 '가드레일' 조항에 대해선 "국가안보 우려의 원천이 되는 특정 국가에서 제조 능력을 확장할 수 없다" (중국)
- 수익 공유는 지원된 자금의 75%까지다
- 보조금을 받는 기업들에 대해선 공장(팹)이나 건설 현장 인근에 보육시설을 설치해야한다
- 미국산 철강과 건설자재 사용해야한다
- 반도체 인력 양성 프로그램도 마련해야한다
- 보조금을 신청하는 기업은 자사주 매입도 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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